승부의 진정성, 정치의 길을 묻다

프로야구 43년의 열기와 대한민국 정치의 냉혹한 현주소

김헌태논설고문

2025-08-15 23:18:37

 

 

 

국민의 여름을 달구는 녹색 그라운드

대한민국의 여름은 언제부턴가 프로야구의 함성과 함께 시작된다. 1982년 원년 개막 이래, 프로야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국민 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라운드 위의 땀방울과 타구음, 응원가와 환호성은 세대와 계층을 넘어 하나로 어우러진 축제의 장을 만들어왔다.

올해 역시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의 관람석은 연일 매진 행렬이다. 표를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리는 시민들이 부지기수이고, 중고 거래 시장에서는 웃돈까지 얹어 표를 사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수도권과 지방을 막론하고 전국의 야구장은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집계에 따르면 올 시즌 누적 관중 수는 벌써 작년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고, 시즌 종료까지 1,000만 관중 돌파도 거론된다.

프로야구는 이렇게 ‘공정한 경쟁’과 ‘열정의 승부’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매력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관중이 말한다, 야구 인기의 궤적

관련 자료들을 종합하면 1982년 원년인 출범 첫해는 140만 명대 동원, 경기당 평균 6천 명 수준이었으나, 성장기(1990년대–2000년대 초)에는 1995년 5백만 명 돌파하고 2009~2012년까지 최고 전성기 기록했다. 코로나 충격과 회복기인 2020~21년에는 급락 후에 2023년 다시 급반등하여 전체 프로스포츠 관중 51% 증가 중 야구 31.5%를 차지했다. 2025년 최근에는 전반기에만 700만 관중 돌파하고 경기당 평균 17,266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하였고 그 행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런 데이터가 전하는 메시지는 첫째 팬들의 사랑은 경기장에서 증명된다는 사실이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도 프로야구는 계속해서 국민의 선택을 받으며 축적된 문화 콘텐츠로 성장해 온 원동력이 되었다. 두 번째는 정치와 대비되는 공정한 시스템이다. 팬들은 결과와 과정 모두를 존중하고, 실패에도 재도전의 열망을 보인다. 이는 프로야구가 지닌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다. 세 번째는 시대적 열기와 미래 정치의 교훈이다. 야구장은 팬의 지지를 기반으로 정직하고 규칙적인 경기를 펼치며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정치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며 국민이 바라는 자세’라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정치, 그라운드의 정신을 잃다

그러나 야구장 밖으로 눈을 돌리면, 그라운드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은 여전히 변법과 음모,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다. 권력의 그늘 속에서 은밀히 거래되는 이권, 국민의 눈을 가리는 왜곡된 여론전, 정정당당함 대신 정치공학적 계산이 지배하는 의사결정. 이 속에서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임계점을 넘어섰다.

프로야구에서는 판정이 오심이면 곧바로 비디오 판독으로 바로잡히지만, 정치판에서는 명백한 잘못도 책임을 지는 이는 드물다. 그라운드에서는 규칙을 어기면 곧바로 퇴장하지만, 정치에서는 규칙 위반조차 해석과 변명으로 덮여버린다. 이 차이가 바로 국민의 환호와 외면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원년의 기억, 초심의 상징

1982년,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의 열기 속에서 프로야구라는 새로운 축제를 시작했다. 동대문야구장과 잠실야구장에서 울려 퍼진 첫 플레이볼의 함성은 단순한 경기 개막이 아니었다. 그때의 선수들은 승패 이전에 ‘야구를 한다’라는 자부심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초창기 구단 운영은 미숙했고 시설도 열악했지만, 그라운드 위에서는 오직 승부와 명예만이 존재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민주화의 길을 걸으며 국민이 바랐던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원칙과 진심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권은 ‘초심’을 잃고 권력 유지와 세력 확장에만 몰두하게 됐다. 프로야구 원년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그 초심이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정함이 만드는 신뢰

야구가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공정함’이다. 심판의 판정은 비디오 판독으로 검증할 수 있으며, 승부조작은 엄격한 처벌로 뿌리 뽑으려 한다. 규칙 위반이 발각되면 스타 선수라도 예외 없이 징계를 받는다. 팬들은 이런 시스템이 존재하기에 경기 결과를 믿을 수 있고, 패배에도 승복할 수 있다.

정치는 이와 반대로 간다. 여론조사 조작, 부당한 입법 절차, 제 식구 감싸기. 국민이 믿고 싶은 ‘판정 시스템’이 부재하다. 스스로를 견제하는 내부의 룰이 없다면, 그 정치판은 이미 게임의 규칙을 잃은 ‘무법지대’가 된다.

 

승패를 인정하는 용기

야구에서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승패를 인정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자세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패배를 인정하는 일이 드물다. 선거 패배는 곧바로 책임 공방과 분열로 이어지고, 정권 교체 후에는 전 정권을 향한 보복 정치가 반복된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정책의 연속성과 국가의 비전이 사라지고, 정치는 끝없는 ‘복수극’이 된다. 팬들은 패배한 팀을 향해 “다음에 잘하자”라고 격려하지만, 국민은 정치권에 더 이상 그런 격려를 보내지 않는다. 승복과 재도전의 용기를 잃은 정치에는 미래가 없다.

 

정치가 야구에서 배워야 할 것

정치가 야구에서 배워야 할 것은 많다. 첫째, 명확한 규칙과 공정한 집행이다. 정치에서도 룰 위반에는 예외 없는 처벌이 필요하다. 둘째, 성과보다 과정의 정직성이다. 정치 과정이 투명해야 국민이 결과를 받아들인다. 셋째,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 도전하는 문화다. 이는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된다. 야구는 해마다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지만, 정치판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정치 구조 속에서 국민의 불신은 더욱 깊어진다.

 

새로운 정치 시즌을 위하여

올해 프로야구의 뜨거운 열기는 그라운드 밖의 정치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쪽은 매진 행렬 속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고, 다른 한쪽은 분열과 냉소 속에서 국민을 갈라놓는다. 정치는 더 이상 변명과 음모로 국민의 시선을 속일 수 없다. 이제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치 1982년 원년의 선수들이 그랬듯,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해야 한다.야구의 한 경기는 9회로 끝나지만, 정치의 경기는 국민이 심판하는 한 계속된다. 그 심판이 최종적으로 내릴 판정은, 지금 정치가 어떤 플레이를 펼치느냐에 달려 있다.

 

결론 – 정치의 ‘홈런’을 기다린다

그라운드의 선수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간, 관중석은 숨을 죽인다. 그 순간의 한 방이 팀의 운명을 바꾸듯, 정치에도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책의 홈런’이 필요하다. 국민은 완벽한 정치인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정직하게 뛰고, 규칙을 지키며, 승패를 인정할 줄 아는 지도자를 원한다. 그게 야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의 태도이며, 대한민국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제 정치가 이율배반과 표리부동한 허상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정정당당한 그라운드의 정신을 품고 새로운 시즌을 시작할 때다. 국민은 여전히 그 첫 번째 ‘정치의 홈런’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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